젖동냥 - 김영섭 시인
피난 다녀온 후 집은 참담한 몰골로 폐허 뿐이다
주렁주런 매달린 감홍시는 가련하게 춤추고
마당에 쌓아놓은 곳식은 나라에 공출되었고
우물은 냄새가 났다
마을에는 돌림병이 창궐했고
장질부사가 우리 집 깊숙히 처들어왔다
외부인 출입을 막는 금기 줄이쳐지고
통행금지령이 내려져 집안은 깊은 적막에 쌓였다
엄마와 일곱째 동생은 시름시름 앓고
첫돌지난 여덟째 동생은 배가 고파 울며 보챈다
동생을 엎고서 철구네 집으로 달려갔다
내 '동생 젖 좀 주이소' 라고 눈물로 애원했더니
망설이던 어머니는 동생을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
내 모습이 얼마나 측은하게 보였을까
나는 마루에 걸터 앉아 고마움의 눈물을 흐렸다
온몸에 한기(寒氣)가 들어 사시나무 되었고
잠시라도 방에 들어가 몸을 녹였으면 좋으련만...
젖동냥 온 주재에 그냥 밖에서 떨어야 했다
젖 얻어 먹고 울음그친 환한 동생 엎고서
'고맙습니다' 하고 인사드리고 돌아오는 길
이제는 동생이 울지 않을 거라는 안도의 기쁨에
눈물은 흘러도 가벼워진 내 마음 그냥 좋았다
오늘따라 동생의 따뜻한 체온이
차가워진 내 몸을 빨리 녹여 주었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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